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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놓치기 아까운 제품 - 핫셀블라드 X1DPosted Dec 27, 2016 9:33:27 AM

박찬용

각종 남성잡지 피처 에디터로 활동했다. 현재는 더기어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iaminseoul@gmail.com


디지털 카메라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정도면 됐다 싶은데도 계속 뭔가 새로운 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좋아. 대단해. 그런데 저런 걸 누가 사지?'싶은 물건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잘 팔린다. 필름이 사실상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어떤 카메라도 스마트폰만큼 잘 팔리지는 못하게 됐지만, 카메라는 여전히 각자 할 수 있는 최고의 결과물을 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놓치기 아까운 올해의 물건으로 꼽을 만한 카메라는 핫셀블라드 X1d다.

핫셀블라드 X1d는 중형 포맷의 미러리스 카메라다. 풀프레임 센서보다 큰 중형 센서를 집어넣고 DSLR이 아닌 미러리스 구조를 택했다. 덕분에 보통 DSLR보다도 작은 크기를 가졌으면서도 더 질 좋은 이미지를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시대라면 생각해낼 수 없었을 거란 점에서 21세기적 변종이다.

X1d의 미덕은 기능뿐만이 아니다. 멋지기까지 하다. 핫셀블라드의 고향은 스웨덴, 덕분에 역시 가슴 뛰는 예의 그 북유럽 디자인을 품었다. 전체적인 실루엣은 보수적인 사각 입체지만 선과 선이 만나는 부분이나 손으로 움켜쥐는 부분은 마음 좋게 곡선을 굴렸다. 직선과 곡선이 적당한 비율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다한다. 라이카의 신형인 T에 비하면 확실히 상냥하고 이탈리아의 가전에 비하면 확실히 덜 호들갑스럽다. 전원 스위치 옆에 있는 'handmade in Sweden'이 한번 더 속삭인다. 안녕하세요. 북유럽 디자인입니다.

X1d는 화질이 좋으며 가벼운데 디자인까지 멋지다.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대신 최신형 고성능 기계인 만큼 비싸다. 이 카메라의 값은 한국 기준 본체만 1천만원 정도다. X1d의 출시에 맞춘 전용 마운트가 장착되었으니 아무래도 렌즈도 새로 사야 마음이 편하다(어댑터를 통해 기존 렌즈를 달 수는 있다). 한 대에 1천만원쯤 하는 카메라를 사는 시장은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사진을 직업 삼는 프로 사진가, 다른 하나는 천만원 조금 넘는 카메라를 취미용구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사진 애호가. X1d는 후자 쪽에 더 치우친 물건이다. 여기서 핫셀블라드와 X1d의 수싸움이 빛난다.

남성 취향의 고급 기계 시장을 이끄는 사람들을 따로 부르는 말이 있다. '리치 아마추어' 혹은 '하이 아마추어'. 이들의 특징은 확연하다. 좋은 사진기의 기능에 감탄할 정도의 기계적 지식이 있다. 핫셀블라드가 가진 영광의 순간을 알 정도의 역사적 지식도 있다. 동시에 이 좋은 물건을 살 정도의 돈도 있다. 즉 돈과 취향이 동시에 있다. 하이 아마추어를 노리는 영역은 카메라 말고도 많다. 최고급 모터바이크, 자동차, 최고급 만년필 등이 이에 속한다. 최상급 작가가 최고급 만년필을 쓸 거란 보장은 없다.

하이 아마추어용 기계들은 프로용 고성능 장비라기보다는 남성용 명품에 가깝다. 일찌기 라이카가 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라이카는 특유의 날카로운 렌즈 감도에 스스로의 역사와 능숙한 브랜드 이미지 조절로 부자의 취미용구가 되었다. 왜 하필 라이카만 에르메스 혹은 폴 스미스와 협업했을까? 왜 올림푸스 X 에르메스는 나오지 않을까? 라이카만 명품의 사치스러운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지금의 라이카는 프로 카메라라기보다는 부티크 카메라의 느낌에 더 가깝다. 실제로도 잡지 에디터 일을 하며 접해본 한국의 프로 사진가 중 라이카를 메인 카메라로 쓰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핫셀블라드의 X1d는 라이카가 다져둔 하이 아마추어적 부티크 카메라 필드의 최신판이다. 이 카메라의 중형 센서는 소니가 만들었다. 터치스크린도 소니 것이다. 즉 소니도 이런 물건을 만들 충분한 기술력이 있다. 니콘과 캐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니나 니콘이나 캐논에서 천만원짜리 중형 포맷 미러리스를 만든다고 잘 될까? 이렇게 컬트적인 스펙의 물건은 컬트적인 이미지의 명품 브랜드를 달아야 그에 걸맞은 관심을 얻는다. 컬트적인 이미지의 명품 카메라 브랜드라니, 핫셀블라드보다 더 걸맞은 곳이 없다.

'핸드메이드 인 스웨덴'이라는 문구야말로 이 카메라의 노골적인 자기소개다. 내가 과문해서인지 '핸드메이드'라는 말을 저렇게 대놓고 써둔 카메라는 처음이다. 보통 핸드메이드는 캐시미어 코트나 비싼 시계를 알리는 말에 쓴다. 이 카메라가 기계적인 성능뿐 아니라 감성적인 접근에도 신경 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프로 사진가가 '핸드메이드 카메라니까 사진이 잘 나오겠군'이라고 생각할 리는 없지 않은가.

핫셀블라드는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 외국 사는 건물주처럼 사장님은 따로 있다. 이들은 경영난에 시달리다 홍콩의 핫셀블라드 판매사가 핫셀블라드를 인수했고 몇 년 후인 2011년 독일의 사모펀드 벤티즈(Ventizz)가 핫셀블라드의 지분 100%를 인수했다. 지금 눈에 띄는 핫셀블라드의 행보는 모두 벤티즈 이후의 것이다. X1d 전에 출시된 나무 손잡이 콤팩트 디지털 카메라 역시 벤티즈 체제 핫셀블라드의 산물이다. 사모펀드 체제 이후 캐릭터를 강화해 하이 아마추어로 나가려는 전략이 확연히 드러난다. X1d는 그 전략의 산물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태어난 근대 기술은 이제 거의 성숙기로 접어든 추세다. 사진과 음악은 처음 나왔을 때는 말도 못하는 고급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엄청난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졌다. 상향평준화의 시대에 브랜드가 할 수 있는 전략은 결국 아주 세세한 차별화뿐이다. 니콘처럼 말도 못 할 성능의 플래그십을 내거나, 라이카처럼 컬트 카메라를 내는 동시에 화웨이 스마트폰에 자신들의 노하우를 팔거나, 후지필름처럼 돈은 화장품으로 벌고 카메라에서 개성을 뽐내거나.

핫셀블라드 X1d는 20세기에 인지도를 쌓은 브랜드가 21세기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방식이란 결국 옛날 영광에 기반한 사치품화다. 그리고 사치품화 전략은 성공했다. 한국에서만 이 카메라의 예약 물량이 100대쯤 된다는 걸 보면.